한국에 지금의 아내를 초대하고 같이 즐기며 생활하는 2년간 우리는 너무나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왔었다.
사랑을 받는 것도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한 것이지만, 사랑을 준다는 건,, 내 사랑에 지금의 아내가 너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본다는 건 그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온다.
그렇게 나는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지금의 아내에게 배웠다.
아내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아내의 자랑을 좀 한다면, 내 아내는 자립심이 강한 사람이고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다.
무거운것도 무겁다고 얘기하지 않고 혼자 끙끙 대거나 대화를 할 때 듣는 사람을 배려해 말하기에 대화의 속도가 느린 편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내가 답답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답답한 생각 속에 나의 배려와 명쾌한 해답이 있기에 직설적이고 분위기에 따르는 나의 성격은 아내를 감탄하기 시작했다.
한 번은 이런 사건이 있었다. 아내의 비자 문제로 아내가 일본에 돌아가서 약 1달 정도 만나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새벽에 출근하는 나는 10시면 잠을 자야 다음날 5시에 무리 없이 출근을 해 일을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10시가 넘어 12시까지도 나와 대화를 이어가며 내가 몇일간 수면이 부족하여 예민해진 상황이 오고야 말았다.
나는 아내에게 "당신은 나에대해 배려를 좀 해줬으면 좋겠어, 나는 내일도 5시에 일어나서 출근해야 하는데, 이렇게 전화를 하고 대화를 늦게까지 해버리면 나는 내일 어떡해야 돼?"라고 말한 적이 있었고,,
정확하게 3초가 지난 후 나는 내가 한 말에 후회를 하였다.
아내는 당신이 그리워서 잠을 조금 포기하더라도 당신과 더 많은 대화를 하고 싶어요 라고 말했다.
그 후로 나는 모든 말에 조심을 해야 하고 배려는 내가 없었다고 후회하며 반성했다. 그리고 아내를 존중하기 시작했다.
아내의 비자 문제를 해결 후 아내가 다시 한국에 들어왔으며 우리의 행복한 생활이 이어졌다.
그리고 나는 아내의 아버지와 어머니, 즉 장인 장모님을 만나러 일본에 가서 인사를 드렸다. 그 부분도 재미있었던 일이 있었는데, 그 당시 나는 일본어를 단 한마디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아내의 한국어에 의존하며 지냈었다.
장인 장모님을 만나기 전에 벼락치기로 일본어를 아내와 공부 하며 준비를 했지만, 실제로 만나는 날은 역시나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아내의 통역에 의존하며 결혼 허락을 받은 우리는 한국에서 지내기를 원하는 아내의 영구적인 안전 비자를 받기 위해 혼인신고를 했으며, 한국 와 일본 두나라 모두 서류를 만들었다. 이런 건 처음이기에 쉽지 않았고 어려가지의 고민할 문제가 생겼지만 아내의 생각 덕분에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그리고 혼인신고를 먼저 한 후 3개월 뒤에 우리는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장인 장모님 그리고 아내의 오빠인 형님을 한국으로 초대 하였고 지방에 살았던 나는 김해까지 모시러 갔었다. 3시간 30분이 넘게 걸리는 거리라서 운전에 신경을 썼고 한국에서의 결혼식은 잘 올렸다.
여러 가지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결혼식이었다. 생각보다 결혼식은 매우 긴장되는 것이었고 내 긴장과 다르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 결혼식이 잘 성사되었다.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결혼식 후에 일어났다. 친척이 많이 없었던 우리 가족은 축의금 정산을 할 때 사람이 없어 나와 어머니가 다른 사람의 정산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고 아버지와 아내는 장인장모님 그리고 아내의 오빠인 형님과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이 상당히 길었고 보통은 결혼식이 끝난 후 행복하게 신혼여행을 출발하는 생각을 했던 것과 달리 나는 전시된 우리의 웨딩 사진과 결혼식에 입었던 턱시도와 드레스, 축의금 정산까지 하게 되었다.
나에게도 형이 있다, 형이 좀 도와줬으면 했지만 아이가 2명이라고 뷔페에서 밥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치가 떨렸다.
형이 결혼할 때는 내가 뒤처리를 다 했기에 같은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크게 실망했다. 그리고 아내의 가족에게 죄송했다.
앞으로 여러 가지 형과 관련된 일이 글로 써질 것 같지만 최대한 가족이기에 배려는 해야겠지...
이야기를 이어 가자면 결혼식이 끝난 후 다음날 아내의 가족과 나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 오키나와가 우리의 신혼 여행지였기 때문에 아침 비행기 시간을 맞추기 위해 새벽 3시에 김해공항으로 출발하였고 그렇게 안전하게 일본에 도착 후 아내의 가족과 일본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우리는 국내선을 타고 다시 오키나와로 출발했다. 어이없는 게 그 당시 아직도 나는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우리가 오키나와를 신혼여행지로 결정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나는 오키나와 가수인 리미라는 가수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오키나와를 간다고 해서 만날 수 없는 것은 알고 있지만 아내도 한 번도 가보지 않았고 일본의 문화가 식상해졌을 때 다른 문화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다.
오키나와에 도착 후 나는 충격을 받았다. 일단 날씨였는데 그때가 12월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더웠다. 반팔은 춥지만 후드티 정도 입었을 때 딱 어울리는 날씨였다. 아내가 알려준 것이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오키나와 사람과 일본 본토 사람을 구별하는 것이었다.
오키나와 사람은 12월에 경량 패딩을 입는다는 것이었고, 일본 본토 사람은 비교적 가벼운 옷차림이었던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유심히 사람들을 보기 시작했는데 많지 않지만 진짜로 경량 패딩을 입을 사람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숙소는 오키나와의 번화가인 나하에 예약을 했고 생각보다 습한 날씨에 금방이라도 지칠 때쯤 라이브를 하는 식당에 예약을 하고 라이브 공연을 즐기며 가수와 사진을 찍고 오키나와의 음식을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여담이지만 지금도 라이브 가수인 분과 인스타로 연락 중이며 그때 찍었던 사진 및 동영상은 클라우드로 보관 중이다.
오키나와를 여행하며 나는 많은 생각을 했었다. 일본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과 일은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 그리고 가장 중요한 아내가 살고 싶은 나라가 어디인지 등등 나 혼자 결정 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 당시 아내는 임신을 했는데 우리는 임신을 알지 못했다. 임신은 아내도 처음이었고 나도 처음이었기 때문에 아내는 생리가 늦어지나 보다라고만 넘기며 여행을 했는데 문제는 신혼여행을 끝내고 일본 본토로 넘어와서 호텔 조식을 먹는 도중 문제가 생겼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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