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생활]9.시작
그 집이 어느 정도로 약했냐면 아래에서 문을 조금만 쌔게 닫으면 위에 사는 우리 집에 쾅 소리가 울릴 정도로 약했다. 세상에 그런 집이 어디 있겠는가 싶겠지만, 일본에서 이사가 잦았던 나는 그런 집은 아주 많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다.
건물을 약하게 지어놓고 모든 책임을 입주자가 감당하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억울하다. 당시 아랫집도 문 닫는 소리가 크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만 우리를 전혀 개의치 않고 사는 것 같았다. 우리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었지만 그저 똑같은 문제로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싫었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참아보고 더 이상 감당이 되지 않다면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었다. 4층의 남자와 오다가다 자주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나를 피했고, 본인도 잘못을 인정하지만 사과할 용기가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최대한 할 수 있는데 까지 했고, 여기서 더 조심한다면 더 많은 스트레스가 생길 것만 같았다.
그 당시 불안장애가 너무 심해서 작은 소리에 크게 반응하고 예민한 성격이 더욱더 예민해져 하루하루 불안에 살았다. 아이가 유치원에 가면 나의 시간이 남기에 그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해야 했다. 이렇게 집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서는 절대 낳아지는 게 없었고, 나도 무언가의 사회생활이 필요했다. 그래서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게 무엇인가 생각하고 고민했는데, 역시 운동뿐이었다. 평소에 복싱에 관심이 있었고, 복싱을 하고 싶었다. 일본은 투기 종목이 강한 것으로 알고 있었던 나는 가까운 곳에 복싱장을 찾아달라고 아내에게 말을 하였다. 복싱을 배우고 싶다, 가까운 곳에 복싱장이 있다면 예약 좀 해주라며 부탁했다.
아내가 인터넷에 검색을 하더니 가까운 곳에 있다며 다음날 일을 쉬는 날이니 같이 가보자고 하였고 그렇게 아내와 전화로 예약한 뒤 다음날 체육관에 갔다. 하지만 그곳은 복싱장이 아니라 헬스장이었다.
운동에 전혀 관심이 없던 아내는 그만 헷갈려서 잘못 예약한 것이었다. 일단 체험 예약을 했고 헬스장에 왔으니 체험을 받아봤는데 너무 오랜만에 했던 운동이라 다시 하니 재미있었다. 오후 1시에 오픈하는 게 좀 마음에 걸렸지만 가릴 것 없이 복싱이든 헬스든 운동을 하는 게 나에게 있어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했고 그 자리에서 회원권을 가입했다. 위치도 아이의 유치원과 가까워서 운동이 끝나면 바로 아이를 찾으러 가기도 좋았고 가격도 저렴했다. 우연하게 등록한 헬스장에 나에게 은인이 한분 계신데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주고 운동을 무료로 알려주는 선생님이다. 아직도 그 헬스장에 다니고 있고, 그 은인인 선생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때로는 친구처럼 가깝고 내 고민을 다 얘기해도 여러 가지 답안을 주며, 헬스가 혼자 하는 운동이긴 하지만 같이 할 때 더 재미있듯이 내가 항상 재미있게, 내가 원하는 몸을 만들 수 있게 아직도 도움을 주신다. 내가 일본에 와서 처음 사귄 일본인 친구이자 선생님인 것이다.
운동 덕분인지 선생님 덕분인지, 아니면 운동과 선생님 덕분인지는 잘 모르지만 내 병은 조금씩 좋아지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내가 좋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지만, 사람들 속에서 운동을 하고 기본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한국에 갈 수 있게 되었다. 부모님이 비행기 티켓과 한국에서 다 사주시기에 나는 돈을 들이지 않고 한국에 갈 수 있었다. 아이도 아주 갓난아기일 때 빼고는 처음 타 본 비행기에 무서움과 설렘을 느끼고 있었고, 오랜만에 가는 한국에 나도 너무 좋았다.
그리고 가장 그리웠던 건 미안하지만 가족이 아니라 음식과 한국말이었다.
김해공항에 도착했던 느낌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내 집이 아니지만 내 나라와 내 언어가 들리는 안정감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불안장애와 사회적 불안감을 가지고 있던 나는 한국에서 생활 한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일본의 대부분 음식은 간장베이스와 미소 베이스 요리, 생선이기에 나는 일본 음식에 이골이 나있었다. 물론 아직도 입에 맞지 않아 고생 중이고, 대부분 고추장과 고춧가루로 직접 요리해서 먹는다. 덕분에 외식하는 일은 적어서 돈을 아낄 수 있지만 아이는 역시 밖에서 먹는 게 재미있고 맛있게 느껴지나 보다.
그동안 먹고 싶었던 음식을 마음껏 먹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안정감에 깊게 잠을 잘 수 있었다.
평소 아이가 한국말을 하지 못한 것이 부모 욕심에 너무 슬퍼서 일본에서도 계속 집 안에서 한국말을 사용하였는데 말은 하지 못하지만, 대부분 한국말을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서 너무 기쁘고 뿌듯했다.
사실 언어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아이의 국적 선택을 존중해 주면 된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나라의 문화와 생활을 잊어버린다면 그건 너무 슬프게 다가왔다. 물론 내 욕심이지만 난 이 두 나라 모두 아이가 잘 생활했으면 좋겠다.
7살인 지금은 제법 한국말 구사도 잘하고 일본어 역시도 잘한다. 한본어라고 부르던가? 한국어와 일본어를 섞어서 사용하고 있고, 우리 가족은 새로운 도전을 위해 영어를 공부하고 있다.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유일한 내편이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물질적인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는 사람 및 가족이 있다는 건 그건 말로 표현하지 못한 복이다. 멀게만 느껴졌던 가족이 더 끈끈하게 느끼게 된 건 가족이 변한 게 아니라 내가 변한 것이었다.
일본에서 기댈 수 없고 의지할 곳이 없던 나에게 항상 전화를 해주고, 언제든 두 팔 벌려 나를 반겨주었던 것이 내 가족이었던걸 나는 35살에 처음 알았다.
그렇게 행복했던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에 도착했을 때 살면서 이렇게 많이 울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헤어짐이라는 건 언제나 슬픈 일이다. 내가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지만 다시 혼자가 된다는 기분, 언제나 내편이었던 가족과 떨어진다는 느낌, 내 나라, 내 언어와 음식까지 모든 것이 원래대로 되돌아간다는 게 너무 슬펐다.
비행기 안에서도 울음이 멈추지 않았고, 계속 눈앞에 가족이 아른거렸다. 외로웠던 것이었다. 나는.. 여러 가지 만감이 교차하는도 중 비행기 안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짧은 한국여행이 끝나고 비로소 일본에 다시 도착하였다.